티스토리 뷰

반응형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말 등의 내용을 알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읽지 않으시는 것을 권합니다. 

 

비꼬지도, 찬양하지도 못하게 입을 막아버리는 예술가

예고편만 봤을 때 예상했던 시나리오는, 예술의 정점에 다다른 천재 요리사가 미치다 못해 궁극의 요리 재료인 먹는 사람이 먹히는 사람이 되는 카니발리즘에 다다른 잔인하고 아름다운 서스펜스 영화, 정도를 상상했더랬다. 디너에 초대된 고객들이 요리사에게 쫓기는 장면을 보고선 추리해낸 것이었는데, 영화 초반에 소시지와 같은 숙성 고기를 저장하는 창고에서,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죽을 것이라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가이드를 보고 이제 저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서 요리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더랬다. 

일단, 카니발리즘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정말 난도질해서 잡아먹어 버리고 싶은 분노와 허무가 느껴진다. 어떻게 해서 이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을까를 상상해보자면,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작가 혹은 감독이 돈 되는, 잘 팔리는 것을 요구하는 제작사, X도 모르면서 잘난 척하는 평론가, 관객들을 씹어먹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근간의 감정은 분노가 틀림없다. 

영화에는 12명의 손님이 등장한다. 음식점 리뷰로 한 가게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하는 평론가와 그 평론을 주로 싣는 잡지사사장, 돈 많은 부자 부부, 한 물간, 그러나 인기 있었던 영화배우와 그의 오래된 매니저, 이 식당의 주요 투자자와 같은 회사를 운영하는 동업자 3인, 메인 셰프의 요리에 열광하며 찬양하는 광팬, 그의 여자 파트너. 그리고 메인 셰프의 어머니. 영화의 주요 서사는 광팬의 여자 파트너, 마고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마고는 초대되지 않은 손님이다. 모든 사람의 이름표가 명기되어 있는 자리에 마고의 자리는 본래 없었으나, 타일러가 여자친구에게 차이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기회를 얻어 오게 되었다. 마고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고는 타일러에게 돈을 받고 자리에 함께 한다. 타일러는 고용주, 마고는 고용인이다. 

영화의 배경의 배경인 호손은 친환경적인, 자연에 가까운 요리를 위한 완벽한 공간처럼 묘사되지만 마치 감옥같은 인상을 준다. 섬에 있는 것은 오로지 레스토랑, 그리고 레스토랑을 운영하기 위한 요리사들의 숙소뿐인데, 그 숙소는 마치 수용소처럼 사생활이라곤 전혀 없는 철제 침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족'이라고 부르지만, 가족과 같은 따스함은 존재하지 않고, 박수소리 하나에 군사처럼 움직이는 요리사들만이 있을 뿐이다. 

핀셋으로 하나하나 완벽하게 '정성들여' 요리된 음식들은 마음 편히 먹기가 너무 힘들다. 비밀스러운 치부가 인쇄된 또르티아까지만 해도 기분은 나쁘지만 웃어넘길 수 있던 블랙 유머는, 부주방장의 자살로 더 이상 유머가 아니게 된다. 

 

죽음이라는 메뉴, 죽음이라는 것은 정말 완벽한 결말일까?

이 영화에서 영화가 진행되면서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죽는 사람은 총 4명이다. 부주방장, 레스토랑의 투자자, 타일러, 가이드. 결과적으로 마고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죽는다.

부주방장은 위대해질 수 없기 때문에 죽는다. 

레스토랑의 투자자는 대체메뉴를 개발하라고 해서 죽는다.

타일러가 죽게 된 이유는 사실 명확하지 않지만, 추측컨대 같잖게 아는 척을 해서 죽는 게 아닐까 한다. 

가이드는 셰프의 오른팔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하다 죽는다. 

4명이 죽는 이유는 완벽하지 않아서 죽는 것이다. 위대한 요리사가 되지 못해서, 위대한 요리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투자자가 되지 못해서, 위대한 요리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내가 되지 못해서. 

위대함의 어느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렇지 못해서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죽게 되는데, 창작을 하다 보면 느껴지는 자기혐오와 그 자기혐오로 인한 타인에 대한 혐오가 살의로 빚어진 게 아닌가 한다.

예술이라는 영역은 사실 수치화시킬 수도 없고, 그 감각의 영역은 정확한 기준이라는 것이 모호하여 창작하는 사람에게도, 감상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기에 자유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오래된 감옥이자 수용소와 같은 영역이기도 하다. 권위 있는 타인의 평가에 목말라하고, 그 평가에 지배되면서, 성착취나 노동력이 착취가 되더라도 암암리에 묻히는 일이 많은 영역. 

셰프에게 겁탈당할 뻔했던 여자 보조셰프는 그의 낭심에 칼을 꽂아 넣고, 셰프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이 메뉴에 '모든 이의 죽음'이라는 아이디어를 넣은 셰프는 이 것이 가장 완벽한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기뻐한다. 기뻐하는 그녀의 웃음이 너무 진심처럼 보여서 정말 무서웠던 장면이었다. 죽음, 마저도 하나의 소재로 쓰는 완벽한 예술의 경지, 라니. 

 

남을 위해 진심으로 요리하던 마음

요리는 엄청난 정성과 시간과 공을 들여도, 먹어치우는 데는 빠르면 몇 분이면 충분하다. 예술로 치자면 가장 잔인한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그 찰나의 행복, 그러나 생을 영위해나가는 가장 중요한 행위. 먹는다는 것.

완벽하고 위대한 셰프는 내가 남을 위해 요리하던 기쁨을 잊은 지 오래,라고 고백한다. 마고는 완벽하고 고급스럽던 그 어떤 요리도 먹지 못하고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픈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저 '치즈 버거'. 셰프가 남을 위해 요리하는 것이 좋아서 요리를 시작한 그때의 그 마음을 담은 치즈버거. 단돈 9달러. 무려 1200달러가 넘는 고급 메뉴의 끝은 죽음이었지만, 단돈 9달러의 치즈버거를 버릴 수 없어 포장해간 그녀는 살아서 섬을 탈출한다. 재미있게도 셰프가 직접 손수 요리한 메뉴는 그 치즈버거뿐이었다. 그녀는 섬을 탈출하며 1200달러가 넘는 메뉴의 메뉴판으로 입을 닦고 버린다. 

마지막 메뉴의 재료는 레스토랑, 요리사, 손님이었다. 마시멜로는 싸구려 재료지만, 어릴 적의 향수와 맞물리며 그 어느 것과도 대체할 수 없는 추억의 맛으로 기억된다. 1200달러가 넘는 고급 레스토랑의 마지막 재료. 그 싸구려들로 치장된 나의 동지이자 적인 고객들을 보며 셰프가 느낀 마지막 감정은 희열이었을까? 계급주의나 기타 등등의 여러 은유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 감동을 모르는 너희 같은 것들은 말로 해서는 알아들을 수 없으니 이렇게 살을 태우고 고통을 느끼며 깨달아야 한다는 복수심이었을까? 함부로 떠들어대는, 나의 완벽을 향한 열정과 정성을 몰라주는 타인들을 깡그리 태워버린 결말을 낸 작가의 마음은 어디로 향했을지 궁금하다.

비틀스가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All you need is love. 싸늘하고 냉정한 평가에 지쳐버린 모든 예술가들에게 당신의 예술을, 당신의 작품을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싶어지는 영화이다.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행복하니까 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