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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글입니다.

반전영화는 아니더라도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은 읽지 않으시는 것을 권합니다. 

 

복이라니, 복이라니, 복이 많다니

내가 '찬실'인데 누가 나한테 저런 소리를 했다면, 나는 아주 화를 내며 저 사람이 나를 놀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영화 속 '찬실'은 나이 40에, 집도 없고, 남자도 없고, 그나마 있던 일복마저도 뚝 끊겨버린, 누가 봐도 복 없는 인생의 시점에 서 있습니다. 벌이가 끊기는 바람에 그녀는 산동네 단칸방으로 이사하게 되고, 그리고도 수입이 없어 같이 일하던 동료 배우 '소피'의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됩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복이 많은 사람은 '소피'입니다. 얼굴도 예쁘고, 딱히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운동 수업도 듣고, 불어 수업도 듣고, 어려움에 처한 언니를 가사도우미로 써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습니다. 사려 깊어 보이진 않지만, 마음씨는 착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복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인물은 '소피'가 아닌 '찬실'입니다. 

저 '복도 많지'라는 말투는, 보통 남의 집에 경사가 있을 때, 누구 누구네는 복도 많지,라고 하는 그런 말투를 떠올리게 합니다. 부러움과 시샘이 섞여 있지만, 축하를 담고 있는 말투. 그럼 찬실이에게 남들이 부러움을 갖게 될 만큼의 좋은 일이 있어야 할 텐데, 찬실에게는 무슨 복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영화를 보게 됩니다. 

 

처음 그녀에게 다가오는 복은 남자 복인가 싶습니다. 소피의 가사 도우미 일을 하며 만나게 된, 소피의 불어 선생님 '영'은 사람도 착하고, 영화에 뜻을 가지고 공통의 관심사를 통해 가까워지게 됩니다. 따로 만나 데이트도 하고, 많은 대화를 합니다. '영'과의 관계에 설렘을 주체하지 못한 찬실은 먼저 영에게 고백과 함께 포옹을 해버리지만, '영'은 '찬실'을 좋은 누나로 본다며 오해를 사게 만들었다며, 친절하지만 단호히 선을 그어 버립니다. '찬실'은 싸온 도시락통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서둘러 줍고 다시 도망갑니다. 안타깝게도 '찬실'이의 복은 남자복은 아니었습니다. 

 

전화위복, 바닥에서도 힘을 잃지 않게 하는 

 

그러나 남자 복은 없어도 '찬실'이 인복은 많은 것이 분명합니다. 

 

우선은 '소피'가 있습니다. 수입이 없어진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고, 일자리를 줬지만, 그녀를 하대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착한 소피.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찬실이 동료들에 눈에 띄면 찬실이 마음이 상할까 봐 그녀를 숨겨주는 소피. 숨어야 하는 그 상황 자체가 찬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있겠으나, 그것을 감싸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다음은  '장국영'이 있습니다. 귀신이라 인복이라 말하긴 뭐하지만, 귀신이지만, 영 귀신같지 않은 '장국영'. 아비정전의 장국영처럼 흰 런닝에 흰 사각 팬티 하나 입고 돌아다니는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귀신. 조상신은 아닌 거 같고, 찬실을 지켜주는 영화의 신이 있다면 장국영일까요. 혹은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가진 찬실의 내면의 페르소나일 수도 있겠습니다. 

 

장국영 : 외로운 건 그냥 외로운 거예요. 사랑이 아니에요. 찬실 씨가 정말 뭘 원하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

            당신 멋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좀 만 더 힘을 내 봐요. 

 

이 대사는 엄청난 성찰을 담고 있는 대사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면전에서 무안을 당하고 돌아온 찬실에게, 당신은 멋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사실 영화를 보는 저에게도 너무나도 위로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위로가 필요했던 찬실은 정말 위로를 받았기에, 필요한 복을 얻은 것은 맞겠습니다. 영화의 거의 끄트머리쯤 처음으로 깔끔한 검은 목폴라를 입고 나타난 장국영에게 찬실이 말합니다. 

 

찬실 : 내가 좋아하는 일은 나를 꽉 채워줄 거라 믿었어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장국영 : 제가 멀리 우주에서 응원할게요.

찬실 : 고마웠어요.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그리고는 그를 응원하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찬실이 산동네로 이사할 때도, 찬실의 살림살이를 같이 이고 지고 함께 산을 올라준 동료들. 그리고 다시 찬실을 찾아와 다시 같이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동료들. 내가 끝이라고 생각한 자리에 다시 나를 찾아와 주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시작할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전구는 나갔지만, 환한 보름달은 있는 산동네 집.

전구를 사러 찬실을 비롯한 찬실을 찾아온 동료들이 모두 전등 하나 없는 비탈진 밤길을 걸어내려 간다.

찬실에게만 손전등이 하나 들려 있다. 달에게 맹세하고 싶다는 소피에게 찬실이 말합니다. 

 

찬실 : 맹세는 하지 마라, 달도 변하는데 뭔들 안 변한다고. (...)  먼저 가라, 비춰줄게. 

          (멀어져 가는 동료들 뒤에서 달을 향해)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새하얀 설원으로 뻗어나가는 기차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쓱 봐도 작은 상영관. 

   빈 상영관에 장국영 혼자 영화를 보고 있다. 혼자 일어나 기립박수를 친다.

   기차는 끝없이 설원을 달리며, 막을 내린다.   

 

막을 내리는 영화를 보며, 저는 찬실에게 많은 복은 인복과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전화위복'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재난과 화난이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됨. 인생의 바닥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다다렀을 때, 이것이 바닥이 아님을, 여기가 내가 올라가게 되는 지점임을 마음먹게 되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그렇기에 또 통상적인 믿음이자 진리가 되며,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 남아있던 '희망'과 같은 말. 

복(福)이라는 단어는 너무 추상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단어이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복'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삶을 살아갈 힘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끊어지지않고 이어나가게 하는 힘. 나에게 존재한다는 그 '복'을 믿으면, 내가 나에게 주는 위로로는 꽤 괜찮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할머니 : 안고 쥐고 있으면 뭐해, 버려야 또 채워져.

 

찬실의 주변을 채우고 있는 인복 중 한 명인 집주인 할머니는 한글을 모르시지만, 저승사자가 빨리 자기를 잡아가야 한다고 되뇌지만, 죽어가는 화분 하나도 소중히 하며 살리려고 애쓰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입니다. 늦은 나이에도 한글을 배우고, 다시금 꽃처럼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보름달에 간절히 소원을 비는. 

 

다 써놓고 보니 찬실이는 정말 복도 많은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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